퇴직연금 총 적립금은 382조원을 넘어섰다. 5년 만에 2배로 불어난 규모다. 그런데 정작 이 돈을 실제로 '연금'으로 받는 계좌는 10곳 중 1곳뿐이다. 나머지 9곳은 목돈으로 빼서 써버린다. 퇴직연금이 얼마나 쌓이고, 어떻게 받아야 손해를 안 보는지 구체적인 숫자로 따져봤다.
DB형과 DC형, 뭐가 다른가
퇴직연금은 크게 두 갈래다. DB형(확정급여형)은 퇴직 시 받을 급여가 미리 정해져 있고 회사가 적립금을 책임지고 운용한다. DC형(확정기여형)은 회사가 매년 임금총액의 12분의 1 이상을 근로자 개인 계좌에 납입하고, 근로자가 직접 운용해 그 성과에 따라 최종 급여가 달라진다. 원금만 놓고 보면 DB형이 유리해 보일 수 있지만, DC형에서 운용 수익이 잘 나면 최종 수령액이 DB형을 앞지를 수 있다. 참고로 DB형에서 DC형으로 전환은 가능하지만, 반대(DC→DB)는 어렵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쌓이나 — 시뮬레이션
한 시중은행의 퇴직연금 계산 사례를 보면 감이 잡힌다. 35세 직장인이 매달 50만원씩 DC형에 적립하고 연 5% 수익률로 30년(65세까지)을 운용했다고 가정하면, 예상 적립액은 약 4억1,600만원이다. 이걸 연금으로 수령하면 세후 약 3억7,400만원, 일시금으로 한 번에 받으면 세후 약 3억2,800만원으로, 그 차이만 약 4,600만원에 달한다(연금 수령 시 낮은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수익률 가정을 낮춰 단순 원금만 적립했을 경우보다, 연 5% 수익률로 20년을 운용하면 약 1.6배, 연 7%면 약 2.1배까지 최종 적립액이 불어난다는 분석도 있다. 물론 이는 원리금보장형이 아니라 실적배당형 상품(펀드, ETF 등)에 투자했을 때를 전제로 한 수치이고, 실제로는 원금 손실 위험도 함께 감수해야 한다.
3억7,400만원을 월급처럼 받으면 얼마인가
위 시뮬레이션의 연금 수령액(세후 약 3억7,400만원)을 단순히 20년(240개월)으로 나누면 월 약 156만원이 된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원금을 그대로 나눈 값이고, 실제 연금 상품은 남은 적립금을 계속 운용하면서 지급하기 때문에 운용 수익률에 따라 이보다 더 오래, 혹은 더 많이 받을 수도 있다. 법정 최소 적립률(임금의 8.3%)만 놓고 보면, 30년을 꾸준히 가입했을 때 은퇴 전 소득의 18~20%를 보장할 잠재력이 있다는 게 정부 통계의 설명이다. 다만 이건 '잠재력'이라는 표현에서 보이듯, 실제로 이 정도까지 채우는 사람은 흔치 않다.
왜 90%가 일시금으로 빠져나가나
2023년 통계를 보면, 그해 퇴직연금 수령이 시작된 계좌 중 연금으로 받은 비중은 10.4%에 그쳤다. 나머지 약 90%는 일시금으로 수령했다. 흥미로운 건 금액으로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총 수급 금액(15.5조원) 중 49.7%(7.7조원)는 연금으로 지급됐는데, 이는 적립액이 큰 사람일수록 연금으로 전환하는 경향이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연금수령 계좌의 평균 총수령액은 1억3,976만원인 반면, 일시금수령 계좌의 평균은 1,645만원에 그쳤다. 적립액이 적을수록 "이 정도면 그냥 목돈으로 받아 쓰자"는 유인이 커지는 셈이다. 문제는 2023년 한 해에만 중도인출 3조원, 해지인출 14조5,000억원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언론에서는 이를 두고 퇴직연금이 "노후 대비가 아니라 생활자금 통로로 전락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중도인출하면 얼마나 손해인가
퇴직연금은 원칙적으로 55세 이전에는 중도 인출이 제한된다. 무주택자의 주택 구입, 6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한 의료비, 파산선고 등 법정 사유가 있어야 예외적으로 허용된다. 중도인출 시에는 기타소득세 16.5%(지방세 포함)가 부과되는데, 다만 주택 구입 목적이라면 분리과세로 세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다. 중요한 건 중도인출한 금액만큼 미래에 받을 연금액이 그대로 줄어든다는 점이다. 앞서 살펴본 시뮬레이션처럼 연금으로 받을 때와 일시금으로 받을 때 세후 금액 차이가 4,600만원에 달했던 걸 감안하면, 중도인출은 단순히 '지금 쓸 돈이 줄어드는 것'을 넘어 '노후에 받을 돈이 통째로 줄어드는 것'과 같다.
퇴직연금 의무화, 앞으로 더 커진다
2027년부터는 퇴직연금 가입이 단계적으로 의무화된다. 1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시작해 2030년에는 5인 미만 사업장까지 확대될 예정이다. 지금은 가입 대상 근로자의 53.0%만 실제로 가입한 상태(2023년 기준)인데, 의무화가 본격화되면 이 비율이 크게 오를 것으로 보인다. 일부 전망은 이 흐름이 계속되면 2050년경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가 국민연금 적립금을 넘어설 수 있다고 본다.
결국 관건은 액수보다 '연금으로 버티는 결단'
정리하면, 퇴직연금은 성실히 30년을 채웠을 때 월 100만원 안팎(위 시뮬레이션 기준)까지도 기대할 수 있는 제도다. 다만 이 숫자는 어디까지나 ①일시금으로 빼지 않고 ②운용 수익률을 어느 정도 확보했을 때의 얘기다. 지금 대다수(90%)가 연금 전환 대신 일시금을 택하고 있다는 통계는, 이 제도가 설계된 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다음 편에서는 국민연금과 퇴직연금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나머지 부분을, 개인이 직접 준비하는 3층 개인연금으로 어떻게 메울 수 있는지 살펴본다.
(※ 본 포스팅은 투자 권유가 아니며, 본문의 수익률(연 5%)은 예시를 위한 가정치일 뿐 실제 수익률이나 수령액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투자 판단과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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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형/DC형 — 퇴직연금의 두 유형. DB형은 회사가 급여를 확정해 책임 운용하고, DC형은 근로자가 직접 운용해 성과에 따라 급여가 달라진다.
중도인출 — 퇴직연금 적립금을 55세 이전, 법정 사유(주택구입·요양비 등)에 한해 미리 인출하는 것. 인출액만큼 향후 연금 수령액이 줄어든다.
📰 참고 기사:
퇴직연금 총 적립금 382.4조원, 5년간 2배 성장 - 고용노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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