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금융이력이 부족한 청년·외국인도 신용카드를 더 쉽게 발급받을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신용평가 체계를 오는 12월 도입하기로 했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15일 하반기 업무보고에서 밝힌 방침인데, 이는 단독 정책이 아니라 정부가 추진 중인 '포용금융' 기조의 한 축이다.
정확히 뭘 하겠다는 건가
핵심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신용평가에 반영되는 연체이력 조회 기간을 지금보다 단축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통신요금·공과금 납부 이력, 소비 패턴 같은 비금융 데이터를 활용하는 '대안신용평가(대안CB)'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대출·연체 기록 같은 전통적인 금융 이력이 부족하면 실제 상환 능력과 무관하게 신용카드 발급조차 어려운 경우가 많았는데, 이 '신파일러(Thin-Filer)'들을 통신비 납부 이력이나 소비 패턴 같은 다른 데이터로도 평가해주겠다는 취지다. 금융위에 따르면 이런 신파일러의 신용점수는 2024년 말 기준 평균 710점 수준으로, 실제로는 상환 능력이 낮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게 정부 측 판단이다. 여신금융협회는 이 방침에 따라 카드업계의 평가체계 구축을 지원하기 위한 현황 파악에 착수했다.
이게 왜 '포용금융' 전체 그림의 일부인가
이번 조치는 정부가 추진 중인 더 큰 정책 패키지의 일부로 봐야 한다. 금융위는 같은 업무보고에서 서민금융 공급 확대, 인터넷전문은행의 중저신용자 대출 목표 비중을 현행 30%에서 35%로 상향, 새희망홀씨 대출을 2028년까지 2조원 늘리는 계획 등을 함께 내놨다. 기업은행은 신용도와 무관하게 연 4.9% 금리를 적용하는 상품도 준비 중이다. 이런 흐름의 배경에는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이 최근 소셜미디어에 "언제까지 연체 기록이나 카드 이력만 쳐다보고 있을 것인가. 낡은 신용평가의 틀을 과감히 넓혀야 한다"고 밝힌 것도 한몫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는 왜 '기대 반 우려 반'인가
카드업계 입장에서 이 정책은 사실 새로운 사업 기회이기도 하다. 국내 카드 시장이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신파일러는 카드사들이 주목하는 '새 먹거리'로 꼽힌다. 다만 우려도 만만치 않다. 첫째는 통일된 평가 기준이 없다는 점이다. 금융기관마다 통신비, 공과금, 소비 패턴 등 서로 다른 비금융 데이터를 각자 다른 방식으로 수집·평가하고 있어, 업계 일각에서는 "충분한 장기 검증 없이 대안신용평가 도입 경쟁에 나설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모형을 얼마나 많이 내놨는지, 대출을 얼마나 공급했는지가 성과 지표가 되면, 정작 연체율이나 부도율 같은 사후 검증은 뒷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건전성 우려다. 금융권에서는 대안신용평가 활성화 자체에는 공감하면서도, 중·저신용자 금리를 일괄적으로 낮추는 식의 조치는 여신 안정성과 건전성 측면에서 부담이 크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셋째는 평가 알고리즘의 공정성 문제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대안신용평가를 활용한 일부 핀테크 대출에서, 같은 신용등급이라도 흑인·라틴계 차주가 백인보다 불리한 조건을 적용받은 사례가 지적된 바 있다. 비금융 데이터 기반 평가가 의도치 않게 특정 집단에 불리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우려다.
필자가 보기엔 — '접근성 확대'와 '건전성 관리'는 원래 같은 방향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정책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금융 접근성 확대'와 '가계부채 건전성 관리'가 태생적으로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목표라는 점이다. 신용이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카드조차 못 만드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넓혀주자는 취지 자체는 타당하다. 실제로 상환 능력이 있는데도 단지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건 비효율적인 측면이 있다. 다만 이 취지가 실제로 잘 작동하려면, 그 평가 모델이 '진짜 상환 능력'을 정확히 걸러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만약 이 걸러내는 정확도가 떨어진 상태에서 카드 발급 문턱만 낮아지면, 그 여파는 한 단계에서 끝나지 않고 도미노처럼 번질 수 있다. 우선 연체가 늘면 카드사는 손실에 대비해 대손충당금을 더 쌓아야 하고, 이는 카드사 수익성과 건전성을 흔든다. 그러면 카드사는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심사를 다시 깐깐하게 조이거나 금리를 전반적으로 올리는 쪽을 택하기 쉬운데, 두 경우 모두 애초에 정책이 도우려 했던 성실한 신파일러들까지 다시 피해를 보는 역설로 이어진다. 개인 차원에서는 카드값을 못 갚아 리볼빙이나 카드론으로 돌려막는 악순환에 빠질 수 있고, 이는 신용점수를 오히려 더 떨어뜨려 '신용을 넓혀주려던 정책이 신용불량자를 양산하는' 결과로 번질 위험도 있다. 다수의 신파일러가 동시에 부실화되면 이는 개별 카드사를 넘어 금융시스템 전체의 리스크로 커질 수 있는데, 실제로 2003년 카드대란 당시 카드사들의 무분별한 카드 남발로 신용불량자가 최대 400만명에 달했고, 카드사들의 평균 자기자본비율은 13%대에서 -5.4%까지 붕괴하며 업계 1위였던 LG카드가 결국 채권단에 넘어가는 사태로 이어진 전례가 있다.
다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이런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게 이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안신용평가가 실제로 안정적으로 작동하려면 충분한 데이터 양과 다양성, 최소 몇 년 치 데이터를 통한 장기 검증(백테스팅), 경기 변화에 따른 지속적 재보정, 그리고 특정 집단에 불리하게 작동하지 않는지에 대한 편향 검증이 뒷받침돼야 한다. 해외에서도 오랜 기간 데이터를 축적해 나름 정교한 대안신용평가 모델을 운영하는 사례가 있는 만큼, '잘 만들어진 알고리즘'이라는 조건 자체는 불가능한 목표가 아니다. 문제는 지금 이 정책의 실행 속도가 그 조건을 충족하기엔 빠듯해 보인다는 점이다. 금융기관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비금융 데이터를 수집·평가하고 있어 아직 통일된 규격조차 없고, 서민금융진흥원의 대안신용평가 모델도 '연내 개발'이 목표라고 밝힌 상태다. 여신금융협회가 이제 막 업권 현황 파악에 착수한 단계인데 정부는 이미 12월이라는 도입 시한을 못박아둔 걸 보면, 지금 흐름은 '충분히 검증된 모델을 두고 도입하자'보다는 '일단 만들고 돌리면서 고쳐나가자'는 접근에 가까워 보인다. 결국 이 정책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신파일러에게 카드를 발급했는가'가 아니라, 시간이 지난 뒤 이들의 실제 연체율이 우려한 수준으로 나타나는지, 그리고 그 사이 평가 기준이 통일되고 충분히 검증된 형태로 자리 잡는지에 달려 있다고 본다.
(※ 본 포스팅은 투자 권유가 아니며, 특정 방향을 단정하는 글이 아닙니다. 투자 판단과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신파일러(Thin-Filer) — 신용카드 이용이나 대출 상환 실적 등 전통적인 금융거래 이력이 부족해, 실제 상환 능력과 무관하게 낮은 신용평가를 받기 쉬운 사람.
대안신용평가(대안CB) — 통신비·공과금 납부 이력, 소비 패턴 등 전통적 금융 기록이 아닌 비금융 데이터를 활용해 신용도를 평가하는 방식.
포용금융 — 소득이나 신용도가 낮아 기존 금융 서비스에서 소외되기 쉬운 계층도 금융 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 방향.
대손충당금 — 금융회사가 빌려준 돈 중 일부를 떼일 것에 대비해 미리 비용으로 쌓아두는 자금으로, 연체가 늘어날수록 규모가 커져 수익성에 부담을 준다.
리볼빙(일부결제금액이월약정) — 카드값 전액이 아닌 일부만 갚고 나머지는 다음 달로 이월하는 결제 방식으로, 이월된 금액에 높은 이자가 붙어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쉽다.
📰 참고 기사:
정부 '신파일러' 신용카드 발급 체계 도입 추진…"기대 반 우려 반"
신용평가에 연체이력 기간 단축…청년·외국인 신용카드 발급 쉬워진다
소비생활 데이터 활용한 신용평가…공정 대출·새 불평등 '두 얼굴'
2002년 카드 대란 - KDI 경제교육·정보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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