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AI 메모리 슈퍼사이클'을 두고 삼성전자·SK하이닉스·중국 창신메모리(CXMT)가 서로 다른 승부수를 던졌다. 삼성은 기술 격차로 방어하고, SK하이닉스는 역대급 실적을 앞세워 생산능력을 밀어붙이고, CXMT는 손실을 감수하고 세대를 건너뛰는 방식으로 추격한다. 최근 2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과 업계 보도를 종합하면 세 회사의 전략이 뚜렷하게 갈린다.
삼성전자 — R&D 16조원, 역대 최대로 기술 격차 사수
삼성전자는 2분기 연구개발(R&D) 비용으로 16조원을 집행했다고 밝혔다. 분기 기준 역대 최대 규모다. 여기에 시설투자(CAPEX)도 16조8,000억원(반도체(DS) 부문 15조4,000억원, 디스플레이 7,000억원)으로 함께 늘렸다. 이 투자를 발판으로 업계 최초로 7세대 고대역폭메모리인 HBM4E 샘플을 출하했고, 6세대 HBM4·DDR5·차세대 낸드 등 고부가 메모리 판매 확대에 주력하고 있다. 회사는 3분기 HBM4 매출이 전분기보다 3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고, 하반기에는 2나노미터(nm) 2세대 공정을 적용한 파운드리 신제품 양산과 AI·고성능컴퓨팅(HPC) 분야 수주 확대도 계획하고 있다. 기술 리더십을 지키는 쪽에 승부를 건 셈이다.
SK하이닉스 — 영업이익률 76%, 역대급 실적으로 실탄 확보
SK하이닉스는 2분기 매출 79조3,187억원(전년 대비 256.8% 증가), 영업이익 60조5,426억원(557.2% 증가, 영업이익률 76.33%)이라는, 숫자만 보면 실감이 잘 안 되는 실적을 냈다. 상반기 누적 매출은 사상 처음으로 100조원을 넘어섰다. 이 실탄을 바탕으로 올해 설비투자 규모를 40조원 후반대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M15X 공장 양산 일정을 앞당기고, 2027년 초 용인 1기 팹 가동 이후 생산능력을 신속히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주요 고객사들과 5년 단위 장기공급계약(LTA)을 체결해 확정된 수요를 기반으로 투자 리스크를 낮췄고, 방열 신기술 'iHBM'과 HBM4E 실물을 처음 공개하며 기술 경쟁력도 함께 과시했다. 지난달 10일에는 나스닥에 주식예탁증서(ADR)를 상장했는데, 해외 기업의 미국 기업공개(IPO)로는 역대 최대 규모였다.
CXMT — 손실 감수하고 세대를 건너뛰는 추격
중국 최대 D램 업체 CXMT는 다른 방식으로 싸운다. 최근 3년(2023~2025년)간 연구개발과 설비투자에 1,852억위안(현재 환율 기준 원화 약 41조6,000억원)을 쏟아부었는데, 이는 같은 기간 매출(951억위안, 원화 약 21조3,000억원)의 두 배에 달하는 규모다. 수익보다 기술 확보를 우선하는 전략이다. 실제로 공급 부족으로 DDR4 가격이 지난해 10배나 뛰었는데도, CXMT는 수익성이 검증된 DDR4 생산을 과감히 중단하고 DDR5·LPDDR5X 생산에 자원을 집중했다. 최근에는 차세대 규격인 LPDDR6 샘플 공급 단계에 진입했고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다만 이는 연구개발·샘플 단계 진전이지, 안정적인 대량 양산이 확정됐다는 뜻은 아니다). 업계에서는 이를 기술 세대를 건너뛰어 개발 기간을 압축하는 '세대도약형 R&D' 전략이라고 부른다. 이런 전략에 힘입어 CXMT는 글로벌 D램 시장 점유율을 7~8%까지 끌어올렸고, 연구개발 인력만 6,259명(전체 직원의 32%)에 달한다.
EUV 없이도 되는 이유 — HBM은 막히고, LPDDR은 열려 있다
CXMT가 HBM 대신 LPDDR 쪽 속도전에 집중하는 배경에는 미국의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수출 규제가 있다. 중국은 EUV 장비를 확보하지 못해 심자외선(DUV) 기반 멀티 패터닝(같은 층을 여러 번 나눠 찍어 미세 회로를 구현하는 우회 기술)으로 버티고 있는데, 고단 적층과 미세 회로·발열 제어가 동시에 필요한 HBM은 이 방식만으로는 진입 자체가 제약적이라는 게 업계 평가다. 반면 LPDDR6는 상대적으로 개발·양산 문턱이 낮아, EUV 없이도 DUV 멀티 패터닝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영역으로 꼽힌다. CXMT가 HBM이 아니라 LPDDR 세대교체에 자원을 집중하는 것도 이런 장비 제약을 우회하려는 선택으로 해석된다. 다만 변수도 있다. 중국 국유기업 상하이 아이성나가 자체 개발한 액침식 DUV 장비 양산을 최근 시작해 올해 약 5대를 CXMT·SMIC 등에 공급하고 2027년에는 약 20대로 늘릴 계획인데, 업계에서는 이 장비가 단기간에 CXMT의 기술 수준을 한 세대 끌어올리진 못할 것으로 보면서도, 초기에는 비핵심 레이어에 투입하고 기존 확보한 ASML 장비를 첨단 공정에 집중시키는 식으로 점진적인 장비 국산화 기반이 마련되는 점은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수율 면에서는 CXMT가 구체적인 수치를 공개하지 않아 정확한 비교는 어렵다. 다만 정성적 평가는 대체로 일치한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CXMT의 HBM 수율은 아직 낮은 수준"이라고 짚었고, 업계에서는 한국 업체와의 격차를 D램 전반은 약 3년, HBM은 약 5년으로 보고 있다. HBM 중에서도 CXMT는 8단 제품의 생산 안정화를 추진하는 단계이고, 12단 이상은 수율·적층·발열 제어에서 추가 기술 확보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이미 HBM4 양산에 들어가 HBM4E 샘플 공급까지 진행 중이라, 제품 세대 기준으로는 최소 두 세대 이상 차이가 나는 셈이다. 이런 수율 격차는 가격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CXMT가 최근 애플에 메모리 공급을 제안하며 삼성·SK하이닉스·마이크론보다 오히려 높은 가격을 제시했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업계에서는 낮은 수율 탓에 제조 단가 자체가 한국·미국 업체만큼 낮지 않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필자가 보기엔 — 세 가지 다른 무기, 같은 전쟁
개인적으로 이 구도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세 회사가 '리더십'을 주장하는 근거 자체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 HBM4 양산 출하'와 JEDEC 표준(8Gbps)을 웃도는 11.7Gbps 동작 속도 등 최초 타이틀과 성능 스펙을 앞세운다. 반면 SK하이닉스는 HBM2E 시절부터 쌓아온 양산 경험과 고객 신뢰, 그리고 실제 숫자(트렌드포스 전망 기준 올해 HBM 시장점유율 약 50%, 삼성은 약 28%)로 맞선다. "기술에서 앞서는 수준을 넘어 양산 경험과 고객 신뢰는 단기간에 따라오기 어렵다"는 SK하이닉스 측 설명처럼, 시장에서도 올해 HBM 선두 지위는 SK하이닉스가 유지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즉 삼성이 '기술 리더십'을 이미 확보했다고 단정하긴 이르고, 오히려 '성능·최초 타이틀의 삼성'과 '점유율·양산 신뢰의 SK하이닉스'가 서로 다른 잣대로 팽팽히 맞서는 구도로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CXMT는 이 둘과는 아예 다른 링 위에 서 있다 — 국가 차원의 지원을 등에 업은 손실 감수 능력이 무기다. 특히 SK하이닉스가 5년 장기계약으로 수요를 먼저 확정 짓고 투자에 나선 방식은, '묻지마 증설'로 과거 반도체 업계가 반복해온 공급과잉 사이클을 의식한 신중한 접근으로 보인다.
다만 CXMT의 세대도약형 전략을 가볍게 볼 일은 아니라고 본다. 매출의 두 배를 태우면서까지 DDR4를 포기하고 최신 규격에 올인하는 건, 단기 수익을 포기하더라도 기술 격차 자체를 좁히겠다는 명확한 의지로 읽힌다. 원화로 환산하면 3년간 40조원 넘는 돈을 쏟아부은 셈인데, 이는 웬만한 국내 대기업의 연간 설비투자 규모를 훌쩍 넘어서는 액수다. 3사가 동시에 대규모 투자를 쏟아붓는 지금 구도가 이어진다면, 결국 관건은 'AI 메모리 수요가 이 공급 확대 속도를 계속 흡수해줄 수 있느냐'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올 것으로 보인다. 삼성·SK하이닉스가 장기계약으로 수요를 미리 확보해두는 방식을 택한 것도,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비책으로 볼 수 있다.
한 가지 짚어둘 부분은, 이 구도가 정확히는 '3파전'이 아니라는 점이다. D램 시장점유율 3위(약 22%)인 마이크론도 HBM4 매출이 이미 10억 달러를 넘어서며 조용히 존재감을 키우고 있다. 삼성·SK하이닉스의 양강 구도가 워낙 선명해 가려지기 쉽지만, CXMT 입장에서 실제로 넘어야 할 상대는 이 세 회사 모두라는 점을 놓치지 않아야 할 것 같다.
(※ 본 포스팅은 투자 권유가 아니며, 특정 방향을 단정하는 글이 아닙니다. 투자 판단과 책임은 투자자 본인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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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고대역폭메모리) — D램을 여러 층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 속도를 크게 높인 메모리로, AI 반도체의 핵심 부품으로 쓰인다.
LTA(장기공급계약) — 공급사와 고객사가 여러 해에 걸쳐 일정 물량을 미리 계약하는 방식으로, 공급사는 안정적인 수요를, 고객사는 안정적인 공급을 확보할 수 있다.
세대도약형 R&D — 기술 세대를 하나씩 밟지 않고 건너뛰어 개발 기간을 압축하는 전략으로, 후발주자가 선두 기업과의 격차를 빠르게 좁히기 위해 흔히 쓰는 방식이다.
EUV·DUV 멀티 패터닝 — EUV(극자외선)는 훨씬 짧은 파장으로 한 번에 미세한 회로를 새길 수 있는 최첨단 노광 기술이다. 이를 확보하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파장이 긴 DUV(심자외선) 장비로 같은 층을 여러 번 나눠 찍는 '멀티 패터닝' 방식으로 우회해야 하는데, 공정이 복잡해지고 고단 적층·미세화에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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